이 사람 홍진오 보은고 재단이사장

 

5월은 보은의 달이다. 보릿고개 넘던 어려웠던 그 시절, 자원이 없었던 한국의 모진 가난을 이겨냈던 원동력은 바로 우리 부모들의 끝없는 교육열이었다. 시골의 논밭 팔아 자식들 등록금 대고 허리띠 졸라매며 살았던 그런 악착같던 교육열이 오늘날 성공적인 한국적 기반을 이뤄내 것이다. 30여 년 동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못 배운 한을 인재양성에 쏟겠다는 절절한 신념 하나만으로 명실 공히 지역 명문고로 성장시킨 배경에는 한 독지가의 운명적인 교육에의 만남이 있었다. 1·4후퇴 때 가족과 헤어진 채 혈혈단신 남하하여 모진 고생 끝에 사재를 털어 사학재단을 인수, 학교법인인 문흥재단(1980년 5월 15일)을 세워 한 평생 사학이념 실천과 인재육성에 외길을 걸어온 홍진오(85) 이사장을 조명한다.〈편집자 주〉

◇유년시절 북한 사리원성당서 종치기·복사로 활동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보따리 장사를 해야 했던 어머니 슬하에 3남2녀 중 둘째였던 그는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 신 후 고아가 된 그는 북한의 한 사리원 성당의 신부에 의해 거둬져 복사를 하며 종치기, 청소 등 온갖 잡일을 도왔다.
“4년 만에 그곳을 뛰쳐나와 시장 통 점원, 심부름 등을 도맡아하며 안 해 본 것 없이 살다가 18세 되던 해 아내를 얻어 장가도 갔고 아이도 얻었지요.”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4후퇴 때 운명 처럼 가족과 헤어진 채 혈혈단신 남하한다. 아내와 자식을 친구 집에 맡겨 놓고 먼저 남하한 그는 인천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50년이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근근이 가지고 남하했던 값나가는 외투 한 벌이 그의 종자돈이 됐다. 그 외투를 팔아 만든 돈으로 생활필수품을 팔아 생활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Taxi기사, 막노동 등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집을 지어 사고팔고 임대업도 하면서 별별 고생을 다한 뒤에 결국 돈을 모으게 되었지요.”
군 복무 4년을 마치고 나온 그는 건축업 뿐만 아니라 운수업, 임대사업 등으로 마련한 기반을 토대로 다시 결혼도 하고 그동안 생각해 왔던 교육 사업을 위해 문을 두드린다.

◇당시 사학재단 운호학원 인수로 인재양성 꿈 이뤄

그의 최종학력은 황해도 은율보통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에 있어 못 배운 한을 풀 수 있는 길은 당시도 교육사업 뿐 이라고 생각한 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원인수나 학교를 설립하여 오로지 인재양성을 해야 하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래서 도교육청에 학교설립 의사를 타진했지요. 그러던 중 지난 1980년 도교육청으로부터 개교된 지 3년이 된 보은지역의 운호 학원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를 듣고 인수를 결심하게 된 거지요. 3년 만에 이사장인 강기용 박사의 작고로 어려움에 빠진 운호학원 인수를 도교육청 도움으로 절차를 밟았지요. 그것이 교육에의 길과 인연이 되었지요.” 당시 법인용 기본재산 기준 상 그의 사학재단 인수는 거의 기부 차원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인수한 학교건물의 수익용 재산은 오직 3층 건물이 다였다. 그의 기본적인 마인드는 현재 서울의 이사장 명의의 땅에 학교법인 명의로 건물을 따로 지정해 놓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그 건물에서 얻는 연 임대 수익료는 고스란히 학교법인 통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관계자의 말이기도 하다.

◇경쟁력 갖춘 1군 우수학교로의 선정 남녀공학 결정

유성종 교육감 시절, 경쟁력 확보와 교과별 상치교사를 배제하자는 교육지침에 따라 고교통합이 이루어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보은고등학교도 남녀공학의 시스템으로 3학급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애착이 대단했던 그는 당시 소음이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된다고 하여 차를 교문 밖에 세우고 걸어서 들어왔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는 또 사비를 출연해 생활관, 여학생 화장실을 건립하는 등 당시에는 여고와의 통합을 이루면 사비로라도 기숙사를 짓겠다는 불타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인수할 당시 보은고등학교는 3층건물 한 동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서울서 인부를 데려다가 직접 학교서 밥 해먹이며 체육관, 특별교실, 자전거거치장, 도로포장 등 손수 일을 함은 물론이었다.
그밖에도 조리실과 식당 겸한 시설 설비에 도비 7000만원과 사비 4000만원의 예산을 출연하기도 했다.

◇우수대학 진학 농촌학생위한 특별장학금제 운영

그는 또 농촌교육 여건의 열악함으로 우수학생이 타지로 유출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기숙사를 지어 활용하는 것은 물론 본교 우수학생을 위한 특별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현재 까지 개인출연금으로 지난 1992년부터 73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연5000만 원 정도의 장학금을 지급할 예정으로 있으며 명문대를 진학하는 우수학생 인재양성에 끝없는 열정을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오는 6일 132명 수용 기숙사인 현송학사 준공식

지난해 정부로부터 기숙형 고등학교로 지정돼 설립 예산 도비 37억, 군비 1억, 이사장 1억 등 모두 39억 원을 들여 강의실, 침실, 정독실, 동아리 실 등 132명이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인 현송학사가 오는 6일 준공식을 갖고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번에 현송학사가 준공되면 명실 공히 지역 인재들을 더욱 많이 수용할 수 있어 타지로 유출 될 수 있는 부작용을 덜 수 있고 학생들을 위한 생활 관리 프로그램을 탄력적으로 운용해 더 나은 우수학교 시스템이 될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사재 일부 학교발전기금·장학금 출연의사 밝혀

그에게 있어 가족이라고는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외아들 홍영택(58)씨가 유일한 피붙이다.
나이가 나이니만치 연로한 그는 노구에도 불구, 언제라도 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달려올 정도로 애착이 남다르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그러나 이번 준공식에는 몸이 불편한 이유로 참석이 불투명한 상황에 처해 있기도 하다.
“여고와 통폐합 되면 사비라도 출연해 기숙사를 짓겠다.”는 당시 그의 의지는 평생을 지역의 인재양성으로 일관해온 그의 사학이념 실천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양복 20~30년 보통, 낡은 구두 절약생활 반증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결 같이 생활에서 허투루 사용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절약을 생활화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30년 된 양복 고수도 그렇고 낡은 구두 착용을 생활하는 것도 그렇다. 그만큼 생활을 절약해 아껴 쓰는 그가 학교일이라면 물심양면 나서서 해결사를 자처하는 것을 보고 학교 일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5년 3월 15일 국민훈장 석류장 포상

학교 인수 후 그는 학교 건물을 신축하는데 있어 팔을 걷어 부치고 직접 손수레를 끌고 나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에서 숙식하며 손수 배운 건축기술로 학교건물을 짓는 등 헌신한 공로로 지난 2005년 국민교육 유공자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포상 받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명문사학의 꿈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홍 이사장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요즘도 늘 마음만은 학교에 두고 있다고 측근은 전했다.
혈혈단신 남하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모은 재산을 인재양성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독지가로서 기억될 뿐이다.
최근 고교재배치 문제를 놓고 진정으로 지역교육과 학생들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헤아리고 있을 그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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