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한 도시의 기차역은 교통수단을 지나 그 지역의 첫 번째 표정이 된다.
특히 시골은 청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늙지 않고 잠겨있는 곳 같다. 붐비지 않고 조용한 소읍의 기차역은 수줍은 말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마터면 역을 지나칠지도 모른다. 내리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해가 아직 완전히 뜨지 않은새벽 시간, 어두운 역에 불빛이 지나가고 때때로 자다 깨면 아직도
이야기를 나직이 하고 있던 어른들, 침을 흘리며 자는 맞은편의 아주머니, 내가 처음으로 옥천역을 가던 기차 안의 기억들이다.

무엇보다 역을 통하여 그 지역에 도착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진입의 확실한 인상은 그 움직이지 않는 역사, 특히 개찰구가 담당한다.
철도회사가 발행한 빳빳하고 손 안에 쑥 들어가는 그 승차권은 단순한 추상적 물건이 아니라 낯선 곳까지 나를 데려다 줄 것을 보증하는 나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이 작고 소중한 기차표로 인하여 나의 여행이 기억되는 일도 종종 있다. 어쩌다 외투 주머니에서 해가
바뀐 기차표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기차표를 검표하는 역원의 제복도 지역의 성문을 열어주는 사람 같게 느껴졌다. 지금은 먼 이야기가 돼버렸다. 인터넷으
로 승차권을 예매하고 개찰구에 역사직원이 사라진 지도 꽤 된 것같다.

뿌연 새벽의 기차에서 내려 고개를 떨어뜨리고 무겁고 피로한 몇걸음을 옮겨놓을 때, 내 귀를 찾아온 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개찰구에서 기다릴 것으로 상상하였던 남편은 객차 앞에 와서 웃고 있
었다. 어느 도시나 그곳에 처음 접근하는 교통기관의 선택에 따라서 그 도시의 인상이 달라진다. 그 특유의 정서가 그 도시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보면 옥천역(沃川驛)은 사전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푯말의 이름처럼 ‘물이 있는 기름진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그루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옥천은 간이역처럼 시골에도착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손바닥만 한 광장을 건너 빛바랜 버스를 떠나보내는 사람들 곁을 지나 차에 올랐다. 6개월 전 남편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간 남편이 올라왔지 내가 내려 온 것은처음이다. 나는 ‘옥천에 도착하였다’라고 속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편의 두 눈 속으로 햇빛이 천천히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햇빛을 타고 은행나무 잎사귀 속에 자욱이날아다니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소읍이지만 옥천의 첫 인상은 아득한 뜰에 와있는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는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다. 주변으로 오래도록 손질하지 않은 숲, 그 넝쿨 속에서 열리던 그 붉은 열매며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고요는 어린 가슴을흔들었다. 그 야릇한 무서움과 침묵의 소리, 멀리서 들리는 대낮의개 짖는 소리, 이 모든 것을 옥천은 나에게 되돌려 주는 것 같았다.
문득 어느 순간 가슴을 열고 보여주는 작고 소중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법한 곳이다. 이 공간은 시간의 양으로도 금전의 양으로도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웃음 때문이다. 남편의 웃음 속에는 세상에서 아직 말해 본 일이 없는 비밀을 나에게만 전해 준다는 표시가 어려 있었다. 그는 옥천에 관해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내가 이곳에서 나의 비밀, 이곳이 나의 소유임을 상기하였다.

옥천의 하늘을 쳐다본 지도 13년째다. 옥천에 내리는 햇빛은 애무하는 꽃물결처럼 피부를 껴안아 준다. 저녁나절 가벼운 바람에 실려 와서 나의 목덜미를 쓸고 가며 벌써 저 앞에 걸어가는 남편의
머리칼에서 번뜩이는 햇빛, 한여름 금속성 소리를 내며 찌르릉거리는 햇빛, 가을철 분수의 물줄기를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햇빛,
한겨울 금강 줄기를 따라 살을 에도록 바람이 불 때도 창 밖에서 내다보면 언제나 따뜻한 겨울의 투명한 햇빛, 베란다의 다알리아 꽃 속에 자란자란 고이는 햇빛, 작은 커피 잔 위로, 벚꽃 잎새들
사이로 스며 나와 흔들리는 반점의 햇빛, 이 모든 햇빛, 이 모든 옥천의 행복의 살 속에 들어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최초의 낯선 시간들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옥천은 그저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사람들이 오면 좋을 곳이다. 아니 적어도 아직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그 행복감의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면 충분하다. 행복한 사람들, 행복해진 사람들이 서로 서로 웃고 입 맞추고 손짓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 마을은 의외로 외롭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남을 위로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빛 속에 누려야 할 행복의 시간도 촉박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슬픔뿐만 아니라 행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옥천의 매 순간 매 순간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
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라고.

옥천 사람들은 스스로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짓, 그들의 웃음이 그 모두를 말한다. 나는 옥천에서 수시로 막연히 나의 육체, 나의 감각이 나무랄 데 없는 풍경과 기후에 저항을 느낀다.
까닭은 작은 이곳에서 나의 마음은 쉬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얄궂은 저항감이 아마도 내가 느끼는 행복의 충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기 있는 행복이다.
 
<저자 소개> 김영미 서울출생, 문학박사, 수필가, 시인《2012 명작선 한국(韓國)을 빛낸 문인(文人)》(천우) 선정, 작가한국문인협회 회원, 옥천문인협회 감사, 대전대학교 외래교수
 '정지용 시와 주체의식'(태학사, 2015) '2016 대한민국학술원 우수 학술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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