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11월에는

이쯤 되면 아무렇지 않게 너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두 번 헤아리고도 삼백삼십오일이면 귓바퀴에 걸려 웅웅대던 목소리, 뇌신경을 몇 바퀴 돌아 심장을 두드리던 쿵쾅거리는 두근거림을 건너 헐 대로 헐어버린 아픔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그 계절을 건너갈 수 있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던 밤들, 어젯밤 쉬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의 손에 노란 은행잎은 와르르 주저앉아 익숙함에 길들여진 아침을 받아들였다.

그래, 밟히는 거야.
형체가 사라진다 해서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
몹쓸 추억의 언저리를 맴돌다
햇살 반쯤 갉아먹은 11월의 오후

비늘눈

― 미조항을 다녀오며
이국에 머문 아버지에게선
멸치 비린내가 났다
달랑 몸뚱이 하나로
떠나온 남해 끝 미조리
통장 잔액란에 얼마간의 숫자가 쌓여야
이곳을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까
시간을 쪼듯
그물에 걸린 멸치를
얼마나 더 털어대야
밤마다 찾아오는 통증조차 무디어질까
‘얼레얼구씨 얼레얼구씨’
머리에 튀어 붙은 멸치 도막에 날아들어
쪼아대는 갈매기 입
무거운 노동을 렌즈에
빨아들이는 이들에게
미소 한 조각 보낼 여유 없는
이 비릿한 여행은 언제쯤 끝이 날까

촘촘한 그물망에 갇혀
은빛으로 서러운
하노이 늙은 아버지의 비늘눈

죽을 쑤며

불린 쌀 한 주먹
양은냄비에 부려 넣고 죽을 쑨다

젓는 주걱 따라
내 속은 비리비리 뒤웅박이다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행복을 찾겠다는 세종시도
대지진에 휘둘린 아이티를 돕겠다는 손길도
역겨울 것 없는데

냄비 속 하얀 쌀은
자꾸 자꾸 몸을 불려가는데
내 몸 하나 지키겠다고
제 손으로 죽을 쓰며
견딜 수 없이 아프게
콕콕 쪼는 슬픔은 무엇일까

술래

어디에 숨을까요
어디로 달아날까요
털끝 하나 보이지 않는
아린 가슴 지그시 쓸어내릴
한평 남짓이면 되겠어요
밝기가 없어도
소리가 없어도
어둠이 전부여도
내 몸 한덩이, 생각 한 줌
드나들만 하다면.

<약력>
이영옥 시인은 196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1988년 오늘의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93년《해동문학》으로 등단, 제6회 대전예술신인상, 제22회 대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날마다 날고 싶다』 『아직도 부르고 싶은 이름』 『당신의 등이 보인다』 『가끔 불법주차를 하고 싶다』 『길눈』 등이 있으며, 2015년 대전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아 여섯 번째 시집 『알사탕』을 상재하였다.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랑협의회, 대전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문학잡지《문학사랑》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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